퇴근길 지하철에서 가계부 앱을 닫아버린 날

그날 저녁, 화면을 끄고 한참 멍하니 있었다

작년 11월쯤이었어요. 퇴근하고 2호선 타고 집 가는 길에 습관처럼 가계부 앱을 켰거든요. 그달 카드값이 287만원 찍혀 있었는데, 이상하게 뭘 그렇게 많이 썼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구요. 배달 12만원, 택시 8만원, 편의점만 6만원. 큰 돈 쓴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잔잔하게 새고 있었던 거예요. 그날따라 머리가 멍해서 앱을 그냥 닫아버렸어요.

Forklift and van at a construction supply yard
Photo by Ryan Liu / unsplash

집에 와서 샤워하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. 서른 셋인데 통장에 모인 돈이 1500만원 좀 넘는 수준이었거든요. 친구들 만나면 다들 ETF니 ISA니 얘기하는데, 저는 적금 두 개 굴리는 게 전부였어요. 뭐가 문제인지 그날 밤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봤어요.

가장 먼저 손댄 건 투자가 아니라 지출 구조였어요

다음 날부터 한 게 뭐냐면, 일단 카드 명세서 3개월치를 엑셀로 옮겼어요. 그러니까 패턴이 보이더라구요. 저는 스트레스 받으면 배달 시키고, 약속 끝나고 귀찮으면 택시 타고, 출근길에 꼭 편의점 들르는 사람이었어요. 본인이 어디서 새는지 모르면 아무리 좋은 ETF 골라도 의미가 없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.

그래서 한 달은 일부러 투자 공부를 안 했어요. 대신 고정비부터 정리했죠.

안 보는 OTT 두 개 해지하고, 통신비 알뜰폰으로 옮기고, 보험 하나는 보장 분석 받아서 줄였어요. 이렇게만 했는데 매달 9만원 정도가 그냥 남더라구요.

그 9만원이 별것 아닌 것 같은데, 1년이면 100만원이 넘잖아요. 30대 재테크에서 제일 먼저 챙겨야 할 게 투자 수익률이 아니라 새는 구멍 막기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했어요.

그다음에야 투자 계좌를 열었어요

지출 정리하고 두 달쯤 지나서, 12월 말에 증권사 앱 깔고 ISA 계좌부터 만들었어요. 처음에는 뭘 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코스피200 추종하는 ETF에 월 20만원씩 자동 매수 걸어뒀어요. 종목 고르느라 머리 싸매는 것보다, 일단 자동으로 들어가게 해놓는 게 저한테는 맞았거든요. 게으른 사람일수록 시스템으로 굴려야 하더라구요.

연금저축펀드도 그때 같이 가입했어요. 세액공제 받으려고요. 연 600만원까지 넣으면 13.2~약 16% 환급되니까, 직장인 입장에서는 이 정도 확정 수익이 흔치 않잖아요. 다만 55세까지 못 빼는 돈이라는 건 분명히 알고 시작해야 해요. 저는 월 30만원으로 시작해서 부담 없이 가는 중이에요.

지금 와서 느끼는 건

6개월 정도 지나서 통장을 보니까 숫자보다도 마음이 좀 달라졌어요. 예전엔 월급날 다음 주가 되면 막연한 불안이 있었는데, 지금은 어디에 얼마가 들어가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지니까 그게 없어요. 수익률은 아직 한 자릿수고, 솔직히 시장이 흔들리면 마이너스 찍힌 적도 있었어요. 그래도 일단 시작해두니까 다음 단계가 보이더라구요.

혹시 30대 들어서 재테크 시작이 늦은 것 같다고 조급해하는 분 계시면, 투자 상품 고르는 것보다 지난 3개월 카드값부터 열어보시는 걸 권해드리고 싶어요. 거기서부터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은 것 같아요. 저도 그랬으니까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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